나의 찬란한 색깔에게.

모둠초밥 2025. 2. 2. 03:56

중립고, 빌리버 시점, 컬러버스
 
너의 허락도 없이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어버리고,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뺏겨버리고,
그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그 바람 부는 들판 끝에 서서
자는 오늘도 이렇게 슬퍼하고 있다.
나무가 되어 울고 있다.
/
나태주, 나무


“선배, 좋아해요!..”
 
“싫지 않으시다면 저랑...”
 
“만나 주 실 수 있나요?..”
 
싫지 않으시면, 싫지 않다...
 
“뭐.. 좋아.”
 
고백을 받아주는 이유는 단지 싫지 않기 때문이었다. 싫지 않다면, 싫지 않으시다면. 그런 말들이 쌓이고 쌓인다. 그니까... 좋아하지 않는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잖아. 좋다면?이라고 물어보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싫지 않으니까. 응. 그냥 싫지 않으니까.
 
“저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좋다면서요, 고백받아주셨잖아요.”
 
"이제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이럴 거면 우리 헤어져요!"
 
“.... 응.”
 
좋아하지 않아. 싫지 않냐고 물었으면서, 이런 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왜 터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사이. 이게 내 잘못인가.
 
어릴 때부터 여러 인연들을 만났다. 끝은 항상 사랑고백. 싫지 않다면이라는 질문. 그에 답한 것뿐이다. 싫지 않으니까. 좋아하지 않는다고 싫은 건 아니니까. 사랑이라던가,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했지. 언제나 세상은 흑백뿐이었다. 그것이 익숙해졌다. 운명의 상대 따위 알게 뭐람.

고등학교 2학년. 아, 무언가를 마주했다. 저 아이는 뭐야, 눈 마주쳤다. 세상이 이렇게 밝았던가, 세상이 이렇게 여러 빛깔이었던가,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세상은 거무칙칙한 흑백이 아니었던가. 그래,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 하나? 저 아이가 내 운명의 상대라는 소리야? 아니, 운명의 상대라고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아니라 배웠는데. 가슴이 뛴다. 소리가 저기까지 들릴 거 같아. 지금 멈춰야 한다. 이러면 처음 보는 너에게 모든 걸 줘버릴 것 같다. 주먹을 꽉  쥐고 올라오는 말을 꾹 눌러 담는다. 초면에 너에게 이런 사랑 고백은 이상하니까, "싫지 않다면."의 대한 너의 답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안녕! 난 사타나엘, 네 이름은 뭐야?”
 
“.... 플레이 백.이에요.”
 
이름은 플레이 백, 나보다 1살 연하인 고등학교 1학년, A반 소속. 생각보다 더 딱딱한 아이였다. 항상 책을 들고 다녔고, 전형적인 모범생, 전교 1등 포지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너와 친해지기는 참 어려웠고, 대화를 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거의 불가능! 다가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도, 너와 친해지고 싶었어. 함께하고 싶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진짜 1도 모르겠다! 정말로! 그래도, 너와 친해지고 싶으니 함께 있다. 이곳에 너와 나는 함께 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생각했다. 친구가 아니라도 가끔은 얘기하는, 그냥 아는 선배, 아는 후배라도.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대화를 할수록 감정은 커져갔다. 세상의 색은 점점 밝아졌다.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밝았다. 운동장은 녹색잔디로 이루어졌고 너의 붉은 머리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아, 세상이 이렇게 알록달록했구나. 내가 이 정도로 관심이 없었나? 응,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모노톤의 세상이었는데. 운명의 상대 따위....

“있지, 플레이. 넌 연애한다던가,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던가, 해보고 싶어?”

“.. 글쎄요. 전 장학금 받아야 해서 공부에 집중해야 돼요. 연애라던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고. 운명의 상대는... 이기적이겠지만 저는 색이 보이니까, 딱히 만날 필요도 없다 느꼈어요.”

.. 아, 그렇구나. 넌 그럴 마음이 없구나. 운명의 상대가 나인걸 알면 넌 어떤 반응을 할까. 그러니... 딱히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너에게 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니까. 응, 그러니까. 난 지금도 만족한다. 옆에만 있어줬으면 한다.

“플레이,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 무슨 소리야 이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그냥 아무 말 없이 뱉었다. 그래, 평소라면 그냥 하는 말이지. 근데 지금은 타이밍이 이상하잖아. 지금 하면 누가 봐도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떠보는 거잖아. 망했다. 아 바보 같아! 너는 무슨 말을 할까. 내심 긴장했다. 그래, 기대도 돼. 하지만... 혼자 기대하고 혼자 상처받는 거잖아.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네가 고민을 하다 입을 뗀다. 넌 무엇을, 어떻게 답을 할까.

“.... 그냥 친한 선배요.”

아. 그럼 그렇지. 무슨 기대를 해. 뭐... 그렇지... 근데 왜..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상처받기는. 아, 한심해.



3학년이 됐다. 그럼 넌 이제 2학년이겠네. 너와 함께한 날도 벌써 1년이 넘었다니. 신기하다.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얇고 길게 이어지는구나. 그냥 계속 아는 선후배가 되는구나. 이러는 것도 웃기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고민하고, 결국 혼자 상처받고 만다. 바보 같아. 평생 이런 세상만 살려한다니. 이젠 알록달록한 이 세상도 관심이 없어졌다. 그리고 문득 궁금했다. 너와 연을 끊으면 다시 색을 잃을까? 관심이 없더라도 그건 조금 무서운데. 졸업을 한다면 바쁜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겠지. 전화라던가 문자라던가. 그런 것조차 어렵겠지. 모든 인연은... 그렇게 끝나고. 너와의 인연도 그렇게 끝나면, 다시 모노톤의 인생으로 돌아가는 걸까. 복잡한 생각을 하며 눈을 슬 감았다.

분홍색의 봄, 푸른색의 여름, 붉은색의 가을이 지나고 흰색의 겨울이 왔다. 흰색이라지만 예전에 보았던 흰색과는 차원이 다른 흰색이었다. 역시나 세상의 색은 아름다웠다. 아, 추워. 그래도 좋다. 쌀쌀한 겨울공기와 함께 이런 세상을 보고 있는 게 꿈만 같아.

반은 왁자지껄 얘기하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벌써 졸업이다. 내일 졸업한다. 졸업하고 나면 뭘 할 거냐, 난 빨리 운명의 상대나 만나서 색 좀 보고 싶다, 졸업해도 연락하고 살아라, 우리 롤링페이퍼하자, 나중에 다 같이 동창회도 열자.... 보통 아이들이 할만한 대화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나는 말이야, 좋아하는 애한테 고백하려고ㅋㅋ”

“야ㅋㅋ 고백받는 애는 무슨 잘못이냐?”

... 아? 졸업식날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백?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저래도 되나? 민폐가 되지 않을까? 널 잡을 마음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속내를 털어놓고 싶다. 너의 운명의 상대가 나라고, 너를 사랑한다고, 첫눈에 반했다고.

“중립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졸업식이다. 아... 지루해. 빨리 집이나 가서 발 닦고 자고 싶다. 마지막으로 플레이 얼굴이나 보고 싶다. 아... 교장 말 진짜 많네.

지루한 졸업식이 끝났다. 꽃다발들도 많이 받고 친구들과 사진도 왕창 찍고. 아 피곤해.. 플레이는 벌써 하교했을까? 안되는데. 빨리 가야 하는데.

“야! 사타나엘! 누가 너 부르는데!”

어? 나를 부를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확신이 들었다. 너일 거라고 분명 네가 부른 것일 거라고. 다른 애들한테 꽃다발들을 맡기고 달려갔다. 나무 아래 누군가가 보인다. 아. 너다. 날 불러준 건 너야, 날 기다려준 건 너야. 심장이 빠르게 뛴다. 겨울이어서 일까. 얼굴이 빨개졌다. 너를 제대로 보지 못하겠다.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네가 너무 빛이 나서.

“어, 선배... 그렇게 달려오지 않으셔도 됐는데..”

“아, 아. 어? 응? 아 아니.. 그냥 춥잖아~ 애들 다 하교할 땐데 너무 붙잡으면 안 되니까 빨리 왔지!”

“아 예... 일단, 졸업축하드려요. 많이 받으셨겠지만 이건 꽃다발.”

“아! 아냐! 나 꽃다발 네가 처음이야! 고마워!”

응. 거짓말이다. 하지만 네가 처음이라 생각하고 싶어.

“이제 할 일은 다 끝났는데. 저 가볼게요.”

아. 안돼, 이게 너와의 마지막인 건 너무 허무하잖아.

“자, 잠깐!”

뒤돌아가려는 너의 손목을 붙잡는다. 잠시만 기다려 난 너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아.

“뭐예요? 할 말 있어요?”

“아, 그게....”

좋아한다고 말해. 운명이라고 말해. 마지막을 허무하게 떠나보내지 마. 하지만...

“.... 아니, 그냥~ 마지막이잖아? 공부 지금처럼 열심히 하고! 꼭 원하는 대학 가고! 가끔씩은.. 연락해 줬으면 좋겠네!”

응, 내 욕심이다. 차마 그런 말들을 뱉을 수 없었다. 너에 비해 나는 초라했으니까. 나의 욕심으로 뱉어낸 책임 없는 말들이 너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그건 가슴이 아파오니까. 이런 말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네 앞에서 이 욕심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너에게는 이 진심이 닿지 않도록. 목으로 삼킨 말들이 너는 평생 몰랐으면 해. 나 따위가 너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잖아. 좋아해, 사랑해. 이 말들은 절대 너에게 건네주지 않을게. 나의 사랑의 무게가 너에겐 부담의 무게가 될 수도 있으니까.

“네.. 저도 알아서 잘해요. 졸업축하해요 선배. 저 학원 가야 해서 이만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너도. 무리하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 잘 가.”

멀어져 가는 너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네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실감이 났다. 너를 좋아하는 이 마음은 이제 쓰레기통에 구겨 넣는다. 운명의 상대와 연이 끊긴다면 다시 모노톤의 인생으로 돌아가는 걸까.

다시 오지 않을 학교를 보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고, 마지막은 네가 건넨 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너와의 인연은 이다음부터는 사라지겠지만, 지금도, 미래도,

“세상의 색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네가 나에게 건네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소중히 간직할게. 세상의 색을, 이 아름다운 색을, 찬란한 빛들을.

아, 네 덕분에 네가 없는 세상도 찬란해.

“가장 소중한 선물을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