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네트 (marionette)
-인형의 마디마디를 실로 묶어 사람이 위에서 조종하는 인형
이어집니다.
하얀 종이는 언제나 좋다. 연필로 선을 그으면 그것을 지우면 되고, 물감을 부으면 그것을 닦으면 되고, 구긴다면 그것을 피면 되고, 찢는다면 다시 붙이면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 하얀 종이는 어떻게 되나? 완벽히 복구가 되는가? 아니, 결국 그 백지에는 자국이 남는다. 아무리 지우고, 닦고, 피고, 붙여도. 그 백지에는 자국이 남는다. 악인이라 지칭되는 그것은, 그 자국마저 좋아한다. 완벽히 물들지 않을 것이라면 그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그것을 "너"에게 새겨주고 싶다.
"뭐, 생명체들도 기억을 찾으려고 하기도 하거든요! 레이즈양 같은 로봇들만 기억을 잃는 게 아니거든요. 알 수 없는 것에 진실들을 찾아가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건 생명체와 다를 게 딱히 없네요! 그래도 전자회로 때문이겠지만요. 내가 말했잖아요? 꿈도 딱히 뭐 큰 게 아니어도 좋아요. 내 꿈도 소박한 편이라서요!"
꿈꿀 수 없는 자에게 고한다. 그것은 꿈이라고. 꿈을 꾸지 않는 너는 이 악인의 말에 무어라 답변하랴, 악인은 알고 있다. 너는 이것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마저 악인에게는 기대가 된다. 생각한다. 백지인 너를, 그 기적을, 검은색으로 뒤덮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져다준. 악인은 이미 많은 기적을 경험했다. 그 기적은 언제나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기적이었으니, 너도 가능하지 않을까. 돌멩이가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그 기적을 재현해 주고 싶다.
"그래요, ....네?"
판매업? 당황스럽다. 거리가 멀지 않나? 애초에 그런 천한 걸 자신이 왜 하겠는가. 재능이 있다니, 칭찬이겠지... 안드로이드가 칭찬을 한다는 것도 웃기려나. 무튼, 갑작스레 들어온 순수함에 악인은 당황한 듯이 웃어넘긴다.
"에이~ 난 그런 거 안 해요! 딱히 제 취향도 아니고... 뭐, 재능이 있다는 말은 고맙네요. 레이즈양은 진심으로 칭찬한 것도 아니고 진심도 없을 테니~ 일단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생긋, 웃어넘긴다. 당황스러운 기색도 없었다는 듯이.
부정확한 표현. 평소의 사람이라면 덥석 잡고 말았겠지. 악인은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다. 제 이득에 못 이겨 잘못된 선택을 한, 자칭 '피해자'라는 것들을. 허나, 그것은 감정이 있는 생명체여야 가능한 것. 안드로이드인 너는 그런 감정이란 게 없어서, 너무나도 이성적임에 사로잡혀서. 이득이라는 포장지로 제 본마음을 속이지 못한다면, 그냥 그 포장지를 풀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넌 이성만 있는 "백지" 이기에. 악인은 자신의 본심을 꺼내어도 백지인 건넨 손을 잡아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라면, 그저 아쉬움만 낫겠지. 성격? 성격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는 누군가 물어보기 전까지 악인의 본심을 말하지 않을 것이겠지. 그러니, 악인에게는 그 어떤 손해도 생기기 않는다.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해도, 수락해도.
"아하하! 역시 포장하는 것은 안 통하네요! 안드로이드에게는 안 통하는 건가? 뭐, 그럼 이렇게 해요. 금방 말했듯, 내가 레이즈양의 기억의 편린을, 잃어버린 그 데이터를 찾는 것을 도와줄게요. 손이 닿는 곳까지. 대신, 나에게 오는 이득은 별것 아니에요. 나를 재밌게 해 봐요. 이것도 레이즈양에게는 어려우려나요? 그러면...."
악인은 고민한다. 정확한 "재미"를 말한 적은 없으니. 그저 재미를 주라 하면 피해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그런 것은 악인을 재밌게 해 주었다. 자신이 지정해 주는 것은 딱히 취향이 아니다. 그야 그것을 정해준다면 그 이후에 레퍼토리를 예측할 수 있게 되고, 그 예측은 언제나 맞았기에. 그러니 악인은 고민한다. 너에게 무엇을 말해야 예측이 불가능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애초에, 생물체처럼 예측 없는 행동을, 안드로이드인 네가 따라 할 수 있을까.
"음.... 레이즈양이 할 수 있는 무언가. 설령 내가 하는 말을 따라준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요? 이것도 어렵나?"
그러니, 악인이 하는 말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악인의 장난감,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일 것이다. 너는 백지이니, 그리고 감정이 없으니. 이에 대해 수락해주지 않을까?
"난 생물체라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보다 더 큰가 보네요! 하지만, 그 변수가 어떨지는 모르죠. 그게 좋은 변수 일수 도 있잖아요. 레이즈양에게는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중요한 2%가, 그저 머리가 아닌 마음을 만들어준다면. 재밌을 거 같지 않나요?"
검지로 당신에 가슴팍을 두어 번 톡톡 친다. 생명체의 감정은, 생명체의 마음은, 너에게 없는 심장의 공명소리는 이곳에 있다는 듯이.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 알잖아요!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 그런 거죠, 양철나무꾼도 여러 사건들을 거치며 심장이란 것을 만들어냈죠. 레이즈양도 많은 일을 거치다 보면, 심장을 가진 양철나무꾼이 되지 않을까요?"
산뜻하게 미소를 짓는다. 안다면 알겠지만 양철나무꾼은 진짜 심장을 가지지 못했다. 양철의 심장을 가진 깡통인간은 "이제 난 사랑을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만일 그 2%가 감정으로 차더라도, 너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악인이 운운한 양철 나무꾼의 비유란, 그저 결국 인간을 행세할 뿐인, 깡통인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당신이 알아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수 없다. 악인에게는 얼마나 즐거운 소식인가. 원래에도 일말에 자책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아니, 어쩌면 꽤 최근에서, 그날 마신 차와 함께 버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저 안드로이드, 소모품, 기관단총에 불과하다. 누가 생명이 아닌 것에 죄책감을 느끼겠나. 그러니, 무지한, 백지인 너에게, 기꺼이 악인의 전부를 알려주고, 태엽을 감아주겠다.
그러니, 악인을 위해 춤추고 노래를 해라, 악인의 무대에서, 자동인형을 자처해 보아라.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자동인형이라는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변수인 것을, 누구에게나 태엽을 감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악인의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를 하는 인형들도 자동인형이었다는 것. 악인은 그 자동인형을 어떻게 완벽한 꼭두각시로 만드는지 않다. 방법은 간단하다. 남이 태엽을 감지 못하도록 그 태엽을 뜯고, 인형의 팔과 다리에 줄을 감는다. 그 꼭두각시의 최초는 자신이었기에. 그러니 꼭두각시를 만드는 법, 그것을 이어 그 꼭두각시들이 혼자서 줄을 끊어내지 못하도록 줄을 더욱 팽팽하고 견고히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기꺼이 태엽을 감아줄 테니 어디 한 번 움직여보아라, 그리고 태엽이 끝나는 시간 동안 무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지 못한다면 너의 태엽은 그 누구도 감지 못할 것이니.
"아무래도 그렇죠? 아니, 잠깐! 원시적이라뇨? 그렇게 말하는 건 좀 너무한걸요~ (아니다) 뭐, 줄자 같은 걸 가지고 다니며 정확히 측정하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레이즈양이 말하는 그 원시적인 방법이 어렴풋이라도 알기 편하거든요. 당연히 정확히 알려면 자같은걸 가지고 다녀야 하지만요. 생명체는 시각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더 정확히 알게 돼요. 그러니 그냥 그렇게 듣기만 한다면 모르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거라고요."
당신의 날카롭고 순수한 의문점이 악인에게는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만일 이곳에 저 이야기들에 당사자가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했을까. 당사자들을 데려와 저 의문점을 들려주고 싶을 정도다. 누군가는 역정을 내고, 누군가는 눈물을 떨굴지도 모른다. 그들은 생명체였기에, 깡통인간이 아니었기에.
아, 이것도 너는 이해를 못 하나?
"레이즈양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입에 들어갔다 나온 걸 자기 입에 넣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알 거 같다니! 역시 똑똑하네요. 난 학습능력이 빠른 아이가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큰 선물을 선사했으니.
"음, 한정된 용량이 있는 것은 맞죠. 레이즈양괴는 비슷하죠. 뭐.. 생명체는 해마라는 게 존재해서 기억을 보관하니.. 하지만! 로봇들처럼 원하는 기억만 제외하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불가능해요. 해마는 자신이 통제하는 건 어렵거든요. 그리고 그곳에 문제가 있으면... 평생 모든 기억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류도 있거든요."
악인은 방긋 웃으며 말하기만 한다. 자신의 상관은 아니라는 듯이.
너는 모르겠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고통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네 앞에 서 있는 악인 또한 그 고통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악인으로써 당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겠다. 네가 원하는 것부터, 원하지 않는 것들도. 전부 주입해 주겠다. 모든 고통을, 모든 갈등을, 모든 절망을.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을, 수많은 갈등을, 수많은 절망을, 수많은 자책을... 수많은 부정의 이야기들을 느끼고, 경험하고, 바라보고 살았다. 그것을 남과 공유하게 될 줄은 상상을 하지 못했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하얀 백지에 검은색 크레파스를 다 쓸 때까지, 이 백지를 검게 채울 때까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너에게 악을 선사해 주겠다고. 너에 손에 악을 쥐어주겠다고. 악인은 기꺼이 생명을 탐하는 너에게 양분을 줄 것이라고.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에게 거짓된 심장을 주며 양철 나무꾼을 속인 마법사처럼, 너에게 악을 주어 속여주겠다.
순수한 마음을 더욱 크게 가져라, 그리고 악인의 심연을 보아라. 그 심연이라는 무대에서 힘껏 춤을 추어 보아라. 관객이 만족할 수 있게, 악인이 만족할 수 있게. 드디어 눈물을 흘리고, 이 거짓을 알게 되고, 절망과 후회를 하는 그날. 너는 사랑을 노래하는 깡통인간이 아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절망의 울부짖는 모순되는 진정한 "인간" 이 되겠지.
태엽을 감아줄게. 태엽을 감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생명이 되지 않아도 돼. 오히려 태엽을 감아도 움직이지 않는 골동품이 되길, 녹슬어 움직이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길. 그날이 오면 기꺼이 팔다리에 나의 실을 감아줄게. 나만이 너를 움직이게 할 수 있도록, 그 누구도 너의 태엽을 감을 수 없도록.
그저 나약했을 뿐인 자는 악의 뒤로 숨어 같은 일을 반복한다.
나의 꼭두각시가 되어줘, 나의 마리오네트가 되어줘.
그럼 이 악인은 너의 가슴속에 양철 심장을 넣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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