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AU, 플레이 시점
몰락한 남작가, 사생아 영애. 그저 결혼시장에 팔기 좋은 여자. 아버지가 보는 나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애초에 몰락한 남작가의 사생아를 누가 사? 말이 안 되잖아. 전혀 도움도 안 되고 되려 피해만 끼치는 집안이면서.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 난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이곳에서 사는 건 싫지만 날 누가 데려가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젠장!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왜? 미쳤다고 나랑 결혼한다니.... 근데, 나를 돈을 주고 산거라니.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 아닌가? 이건 노예새끼나 다름없잖아! 내가 물건도 아니고, 애초에 나를 돈 주고 산다니. 치욕이다. 결혼하자 온 것도 아니고 사는 거라니. 무슨 이딴 상황이 다 있어. 어떤 멍청이가 나를 산... 아. 말도 안 돼. 나를 산 게 베넷가라고? 베넷가. 지금도 승승장구하는 유서 깊은 공작가중 하나다. 평민들은 당연지사, 웬만한 귀족들도 베넷가의 눈치를 본다. 그런 베넷가가, 몰락해 가는, 그것도 별볼 일 없는 우리에게 돈을 주고 나를 산다고? 오래 살더니 정신이 나간 것들인가.
"플레이. 빨리 짐 챙기고 나가."
".. 아, 예."
끝까지 차가운 눈길과 말투였다. 어쩜 이렇게... 단 한 번도 나에게 다정한 눈길 한번 주지 않을까. 그럼에도 당신의 딸인데, 나를 만든 건 당신인데. 마치 당신의 오점이 나라는 것 마냥... 그따위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신에게 내가 오점? 지랄한다. 당신이 내 오점이야.... 아무튼, 예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꾸민다. 평소엔 이러지 않아서 그런가, 액세서리라던가... 불편해. 지금 당장 목걸이를 뜯고 드레스의 장식을 뜯고 싶다. 그러면 아버지는 노발대발하겠지. 마지막으로 그런 선물을 선사시켜 주고 싶지만... 그래, 날 버리지 않고 키워준 것만을 보답하겠다.
"그럼,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꾸벅여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아버지는 나를 훑어만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저택으로 들어간다. 하... 진짜 끝까지 엿같게 하네. 그래, 나도 당신 같은 거 필요 없어. 뒤를 돌면 화려한 마차가 나를 기다린다. 집사마저 나보다 고귀해 보여. 베넷가여서 그런가. 마차, 오랜만에 타본다. 마차의 의자가 원래 이렇게 푹신했던가. 달리는 마차를 타며 창밖을 본다. 날씨 좋네. 이렇게 운수 나쁜 날에 세상은 날이 좋다.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장사를 하며 손님과 대화하는 장사꾼들, 작은 공연을 하는 이야기꾼들까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즐겁다. 마치 세상이 나를 따돌린다는 생각까지 든다. 세상에게 따돌림받는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니 저택이 보인다. 저기가 베넷가인가. 화려하기만 하지 생각보다 작은... 뭐야, 뭔데? 가까워질수록 저택이 커진다. 저게 진짜 뭐야. 뭐.. 성이라도 지어? 이게 그냥 공작가 저택이 맞아? 그니까... 이제 여기서 내가 산다고? 아니.. 좋은데... 그래, 솔직히 싫다. 아무리 공작의 부인이 되더라도 웬 몰락한 남작가 영애가 여기 오면 무슨 시선을 받겠는가. 그것도 나는 사생아인데!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뭐 하나 부족함 없는 베넷가가,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택한 걸까. 분명 신붓감은 널리고 널렸고 후보도 많았겠지. 이쯤 되면 슬슬 짜증 난다. 이거 나 놀리는 거 아니겠지. 이게 꿈인가? 차라리 꿈이었으면 한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그 망할 남작가에서 벗어났고 어떤 시선을 받든 내가 공작부인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을 거다. 이게 현실이면... 그나저나, 베넷가의 가주... 꽤 오래 산 사람인 걸로 아는데. 아... 진짜 이상한 아저씨에게 찍힌 건 아니겠지. 소문을 들으면 웬 할배가 나올 수도 있을까. 솔직히 끔찍하다. 그래, 내가 결혼시장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든 건 알아. 27살이나 됐으면 결혼시장에선 컷이지. 그치만 늙은이한테 보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딸인데? 대체 그 망할 양반은 얼마를 받아 처먹었길래 보낸 건지...
"마님, 이제 내리시죠."
"... 아, 아 네."
'마님' 적응되지 않는다. 그니까... 내가 진짜 공작부인이고 고용인들에겐 마님으로 불려야 한다고? 아가씨가 아니라? 인지부조화 온다... 이상한 늙은이한테 팔려가는 것도 기분 더러운데 마님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니... 근데... 가주는 없어 보이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지가 사놓고 마중 나오지도 않았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늙어도 곱게 늙을 것이지 어떻게 사람이 마중도 안 나와. 지가 샀으면서 얼굴도 안 보여준다니... 이게 진짜 미쳤나.
"주인님은 일이 바쁘셔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집사는 정상이네... 유서 깊은 공작가라 그런 건가. 그래, 이 정도로 품위를 지켜야 한다면 고용인들도 품위를 유지해야겠지.... 날 산 걸 후회시켜 주마. 품위추락이 뭔지 보여주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본다. 진짜 크네... 이러다 길 잃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래, 기억할 수 있을 거다. 그 망할 저주가 있으니까. 지금 이것을 잊지 못하겠지. 길 찾는 것쯤은 쉬울 거다. 방이 진짜 많구나... 아니, 우리가 못 사는 거야 여기가 잘 사는 거야?라고 해봤자 둘 다겠지. 베넷가에 그 양반을 어떻게 비벼. 이제 내 방에 도달했다. 문 하나 진짜 화려하네. 진짜 쓸데없이... 집사가 문을 열어주자 보이는 건, 아. 우리 집에선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때의 내 방과는 차원이 달라. 화려하다.
"그럼, 우선 편하게 쉬고 계시길 바랍니다. 주인님께서는 일이 끝나는 대로 응접실에서 기다리시겠다 하셨으니, 나중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 네..."
침대나 소파가 원래 이렇게 푹신했던가, 화장대도 엄청 크네. 안에 들어있는 목걸이와 귀걸이 같은 악세사리들도 전부 화려하다. 옷장 안에 있는 옷들도 평소 입는 드레스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사치품들 뿐이야.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 자기 영주 사람들이나 챙기지. 뭐, 돈이 그만큼 많으니까 그런 건가. 생각해 보면 우리 집과는 다르니까. 없는 돈 끌어모아 사치를 즐기는 것이 아닌 그냥 돈이 많은 녀석들이니까... '플레이 베넷.' 이젠 성씨마저 달라지겠지. 그 양반들이랑은 이제 완전 끝이려나. ...응. 당연히 그러지 않을 거다. 나를 빌미로 돈이나 계속 뜯어내고.. 그걸로 사치나 즐기겠지. 근데, 베넷가가 굳이 그 정도로 할까? 나 하나로 계속 돈을 뜯길까? 어쩌면... 나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있으려나. 그건 조금 싫네. 지가 샀으면 책임지라고! 환불이 어딨어! 지가 좋다매!! 이렇게 된 이상 등골까지 뽑아 먹어주마. 환불 같은 거 못하게 해 줄 거다.
"마님, 주인님께서 모셔오랍니다. 이만 가시죠."
"아, 네. 잠시만요."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난다. 응접실, 꽤 멀려나. 아... 내 방까지 오는 것도 멀어서 죽을 뻔했는데. 아... 힘들겠다... ...예상만큼 힘들다. 진짜 개머네. 차라리 지가 내방으로 오던지. 진짜 웬 늙은이면 다 때려 부수고 나와주마... 집사가 문을 끼익 연다. 이 문도 진짜 화려하네. 역시 베넷가는 다르다. 우리 집의 응접실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기 앉아 조용히 찻잔을 입에 대고 있는 사람이.. 사타나엘 베넷. 이곳의 가주. 천천히 다가간다. 얼굴이 보인다. ...엥? 생각보다 반반하다. 그래, 지금까지 본 남자들 중 가장 잘생겼다. 늙었다며. 오래 살았다며. 지금 저 얼굴이 늙은이냐. 나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이는데. 아니 쟤가 동안인 거잖아. 알고 보니 소문이 구라였던 거 아니야? 찌라시 뭐, 그런 거? 아... 미치겠네 진짜. 다른 의미로 짜증 난다...
"아, 앞에 앉아요. 우리 처음 보죠? 아무래도 그곳에서도 본 적이 없으니."
푸른빛이 조금 돌는 백발,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 검은 헤일로, 왼쪽에 보이는 세 개의 눈. 저 눈이 베넷가의 상징 중 하나랬었나. 소문은 들었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저렇게 생겼구나. 우아하게 미소를 짓는 당신은.. 나와,
"부인,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시는 건지?"
아. 너무 쳐다봤나, 아니 신기해서. 아니 이렇게 뱉으면 안 되지. 것보다 부인이라니 진심이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작님. 그저... 이런 곳을 처음 보기에 조금 낯설어서 그랬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음, 아하하. 전혀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답니다. 되려 저는 좋죠. 이곳이 마음에 들었으면 해요.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싹 갈아엎을 수 있으니 편하게 말해주세요. 제 집이다 생각하고. 뭐! 집이 맞으니까요."
".....아뇨......... 전 다 괜찮습니다 공작님.........."
아... 힘들다... 기력이 쭉쭉 빨린다... 부인이라는 호칭도 오글거리고 이 익숙하지 않은 곳도 너무 낯설고 저 사람의 시선과 수많은 메이드들까지 너무 힘들다... 아................ 신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미친 신이시여.......
"괜찮다면 다행이네요! 뭐, 여기서는 딱히 공작님이라 부르지 않아도 돼요. 공적인 장소라면 몰라도. 이름으로 불러줘요. 나도 이제 부인이라 안 할 거거든요. 달링, 괜찮죠?"
...뭐래미친새끼가. 뭔 달링이야. 그게 더 오글거려 아니 둘 다 오글거려 진짜 살기 싫다. 아... 왜 살지.... 이런미친... 진짜 미치겠네...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지 무슨 달링이야. 이러다 허니 베이비 다 나오겠네 씨발....
"왜 그래요 달링? 뭐 불편한 점이라도?"
"아, 아닙니다. 그래도... 아무리 결혼을 한 사이라도 저희는 오늘이 처음이며, 제가 어찌 공작님의 이름을 입에 담겠습니까. 공작님이 절 어찌 부르든 상관은 안 하오나, 조금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공작님이라 부르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니 말을 들을까 보냐. 사람 잘못 봤거든. 평생 공작님이라 불러주겠어. 이름은 얼어 죽을.... 아, 갑자기 당신이 나에게 다가온다. 처음 볼 땐 무섭지 않았는데. 뭐지 이 위압감은? 잠깐, 잠시만 무슨 짓을 하려고. 눈을 질끈 감는다. 그리고 이마에 느껴지는 옅은 감촉.... 아? 지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거지?
"달링, 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어요. 당연히 강요는 아니에요. 당연히 공적인 장소에서는 이름으로 부르면 곤란하고요. 하지만.. 사적인 장소에서는 그렇게 해준다면 너무 고마울거같은데. 달링의 생각은 어때요?"
...내 생각을 묻는 거야?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지금 이거 협박이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지금 느꼈다. 당신이 나를 산 이유는 절대 사랑해서가 아니구나. 그럼 그렇지. 모든 걸 다 가진 당신이 뭐가 좋다고 이런 걸 사랑하겠어. 무언의 압박이겠지. 젠장, 절대 당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 했는데. 곤란하다. 절대 강요하지 않는 다면서 무언의 강요를 해온다. 손을 대지 않고도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마치 너는 내 소유물의 불과하다는 듯이.
"... 예 사타나엘님."
"님자도 빼고요."
"....예... 사타나엘..."
진짜 가지가지하네. 뭐가 좋아서 지 이름을 불러달라는 건지. 이름 불러줄 친구도 없냐? 그래... 없어 보인다... 없으니까 나 같은 걸 사겠지... 미친것...
"응, 고마워요 달링. 역시 달링을 고르길 잘했어. 그곳에서 있던 일은 모두 잊어요, 내가 정말 잘해 줄 테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요. 달링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사줄게요."
"아... 그... 나라는... 예.....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기쁘다는 듯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표정은 분명 사랑의 빠진 사람의 표정이지. 하지만... 알고 있다. 절대 사랑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결코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겠지. 그래... 걱정 마, 나도 결단코 당신에게 긍정적인 감정 따위 생기지 않을 거니까.
"응, 그럼 이만 일어나요. 나는 조금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저녁식사 시간에 만나요."
"예,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저녁식사... 딱히 같이하고 싶진 않은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진짜 안 온다고? 집사의 말로는 바쁘단다. 그래, 그냥 일만 하다 죽어버려! 그냥 죽어! 죽으면 이 베넷가는 내꺼일거야... 과로로 죽길 빈다... 저주한다 사타나엘... 코스요리마냥 나온다, 메이드들이 줄줄이 서있다. 아, 부담스러워. 체 할 거 같아. 아니 고용인들이 몇 명인 거야? 돈 진짜 많네... 돈 훔치고 달아나고 싶다... 옆나라로 가서 잠적하고 살고 싶다... 신 이 미친새끼야....
식사를 다 마치고 일어난다. 방까지 가는 것도 모두 집사와 동행한다. 아마 길을 잃을까겠지.... 근데도 부담스럽다...
"마님,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예, 이만 들어가세요."
방으로 들어가 문이 닫히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아... 힘들다... 진짜 힘들다... 이 딴 게 인생이라니... 누가 사는 게 즐겁다 했냐... 니나 많이 살아 이딴 거 살면서 처음 봐. 베넷가.가주는 사타나엘 베넷. 그리고 이제 내 이름은 플레이 베넷. 이게 거짓이 아니다. 이게 현실이라니. 하루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곳의 일은 모두 잊어라... 이젠 여기가 내 집이다. 이것만큼은 진실이었다면 좋겠다. 그곳에서의 일은 모두 잊고 싶은 게 맞으니까. 그래,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그 남작가 따위 상종하지 않아도 된다. 난 이제 남작가의 사생아 영애가 아닌 공작의 부인이다. 무슨 시선이 오더라도 그것은 바뀌지 않을 거다. 그 사람이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아, 제대로 씻고 쉬어야겠다.
아, 정작 씻고 나니 잠이 오지 않는다. 정원이라도 가볼까. 밤인데... 가도 되나? 몰래 나간다고 안 혼나려나? 음.. 그래, 허락보단 용서가 쉽다 했다. 혼나면 벽 무늬나 봐야지 뭐. 가디건을 챙겨 걸치고 밖으로 나선다. 마주칠 사람이 있겠어. 정원도 꽤나 크다. 붉은 장미.. 그 외에도 붉은색의 꽃들이 꽤나 많았다. 생긴 거랑 다르게 붉은색이 취향인가. 옷은 죄다 파라면서. 가지가지하네 진짜. 가을이라 그런가. 밤에는 조금 쌀쌀하네. 카디건을 걸쳐도 찬 공기가 살을 쓸어간다. 오늘이 보름이었다. 보름달이 떴다. 낮과 똑같다. 달은 아름답게 빛나고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며 빛을 낸다. 고요한 밤에 선선한 바람소리만이 옅게 들려온다. 아, 낯선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지금도 꿈만 같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그 괴로운 집안의 내 방 천장이 보일 것 같다. 이렇게 고요히 자연을 감상하는 게 얼마만인가. 항상 박해당하기에 바빴지. 무슨 여유를 가지고 정원에서 쉬겠어. 어쩌면, 이곳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고용인들의 은은하게 깔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뭐 어때. 그런 것쯤이야 평생 당해 줄 수 있어. 이곳은 별도 참 잘 보이네. 하... 짧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슬 감았다. 영원히 이러고만 싶어.
... 어. 뒤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무게감, 사람의 따뜻한 체온, 몸을 감싸는 팔, 어깨에 묻는 머리. 지금, 이게, 무슨 짓.
"추운데 여기서 잠옷만 입고 뭐 하고 있어요?"
그러는,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 거린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우리 만난 지 하루도 안 됐거든요.
"아,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잠깐 나와봤어요. 허락도 없이 나와서 죄송하네요."
"으응.. 죄송할 것까지야. 그래도 걱정했다고요. 방에 들어갔더니 보이지 않아서 어디 있나 하고 찾아다녔어요."
찾아다니긴 무슨. ...잠깐, 내 방에 들어갔었다고? 그게 무슨, 아무리 부부라 해도 여자방에 마음대로 들어간다고? 진짜.. 늙어도 곱게 늙을 것이지. 미친 노친네가. 하... 이게 2%만 덜 반반했어도... 내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그리고는 입을 맞춘다. 지금 움직이면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있자. 조금만 참자. 곧 끝날 일이다. 다시 목에 얼굴을 파묻다 이내 입을 맞춘다. 체온이 느껴지는 게 기분이 나빴다. 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 달링, 잠깐만 뒤돌아 볼래요?"
"예? 왜 갑자-"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맞춘다. 허리와 뒤통수를 잡고 벗어나지도 못하게 한다. 말을 하려다 조금 벌려진 입속에 살덩이가 들어왔다. 아, 읍. 잠, 읏. 말도 할 수 없게 밀어붙인다. 아, 숨 막혀. 그만,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말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당신은 눈을 슬며시 감고 이어나갔다. 아, 저항할 힘도 없다. 정신 아득해진다. 머리가 멈춰서인지 그냥, 그냥 차라리 몸을 맡기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당신의 어깨에 손을 살며시 놓는다. 당신이 원하는 건 이런 거겠지. 그래, 맞춰줄게. 당신이 하고 싶은 거 질릴 때까지 다 해봐.
고요한 밤, 둘의 숨소리로만 가득 찼다. 더 이상하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지금 멈추지 않으면...
"프하-."
하아.. 가쁜 숨을 내쉰다. 당신은 태연하게 손수건으로 입만 살며시 닦아냈다. 무엇보다 저 태연하게 웃는 표정이 가장 열받았다. 아, 힘들어. 머리가 핑 돈다. 겨우 중심을 잡다.. 아, 삐끗했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앞으로 쏠렸다는 뜻은.. 지금 내가 당신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거다. 아, 쪽팔려. 짜증 나! 당신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아, 결국 사람이구나. 따뜻한 체온과 들려오는 심장소리. 어린 시절, 그 어린아이가 몇 년이나 사람의 품을 갈구해 왔는지. 모든 걸 포기해서야 사람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것도 날 물건처럼 산 녀석에게. 전혀 기쁘지 않아. 오히려 화만 날 뿐이다. 이렇게 품을 내어주는 당신도 한몫했다.
"괜찮아요? 방금 삐끗한 거 같은데. 발목 어때요?"
"아, 전 괜찮- 앗!"
잠깐, 갑자기 들어 올리는 게 어딨어! 공주님 자세로 안아 들어 올려진다. 괜찮다고, 걸을 수 있다고!
"잠깐, 내려주세요. 공작님, 잠시만요.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름으로 불러달라 했었는데. 그새 까먹었어요? 나 좀 슬플지도!"
뭐래 이 미친것이... 아니, 애초에 생각보다 높아서 조금 무섭다고. 키가 왜 이렇게 커? 무의식적으로 당신을 슬 안았다. 아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바둥거려도 그저 위험하다고만 할 뿐이다.
"방으로 데려다 줄게요. 조금만 참아요."
말을 하곤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당신이 걸어갈 때마다 조금씩 덜썩이는 것이 무언가를 무너뜨린다. 이게 자존감일지, 자존심일지. 왠지 마음이 아프다. 무언가를 후벼 판다. 그저 당신에게 기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상황에서 잠이 온다니. 졸려...
"달링, 자요? 조금 자도 되는데."
아. 잠이 확 깬다. 미쳤다고 당신의 품에서 잠들겠어?
"아뇨, 방에 가서 자고 싶어요. 빨리 데려다주세요."
"뭐, 알겠어요. 내 품에서 자는 달링도 보고 싶긴 하지만, 일단 방에 가고 싶다니까!"
조금 발걸음이 빨라진다. 조금 기대서 쉬다 보니 방에 도착했다. 이제야 내려준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조금 실례를 저질렀네요."
"실례라뇨! 전 오히려 좋았어요."
"...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 뭐야. 뭔데. 왜 너도 들어오는데. 왜 오냐고. 만난 지 하루도 안된 여자방에 들어오는 거냐고. 이게 미쳤나 진짜. 아 화나. 아무리 부부관계라 해도 그렇지...
"... 왜 들어오시는 겁니까?"
"그야 첫날이잖아요?"
...뭐래미친 진짜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망언이다. 뭔 첫날이요. 우리가 식을 올렸어 뭘 했어. 그래 만난 지 첫날이겠지. 누가 처음 만난 여자방에 들어오냐고.
"전... ...사타나엘 당신과 아무것도 할 마음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하하! 난 뭐 하겠다고 말도 안 했는걸요. 일단 달링이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 사람한테 정신 나갔다고 강행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첫날이니까 낯설 거 아니에요. 달링이 자는 것까지만 보고 나갈게요. 그 정도는 허락해 주실 거죠?"
"....예. 마음대로."
하. 싫다. 뭐래미친. 당신이 있으면 잠이 더 안 올 거 같은데요. 당신이 제일 부담스러운데요. 밤샐 거 같은데요. 나가. 나가라고. 꺼져버려! 내가 눕자 토닥여준다, 잠이 안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는 참 피곤했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눈이 감긴다. 아, 사람의 손길을 느끼며 잠에 드는 게 얼마만인지,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잠에 드는 게 얼마만인지. 당신과 정말 서로를 사랑한 연인이었더라면 이 따스한 손길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떡하지. 정말 원했던 것조차 당신 때문에 망가져버렸어. 내가 원했던 모든 게, 이미 포기한 모든 게. 전부 당신 하나로...
잠에 들기 직전에 들은 것은 짧은 입맞춤과,
"달링, 사랑해요."
그 단 한 마디뿐.